사라진 것들의 이름과 그것의 소환

김성호(미술평론가)

 

I. 명명된 것들의 ‘사라진’ 이름 부르기  

김라연의 작업은 작가가 경험한 삶의 주변, 즉 도시 표면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은 도시 안에서 명명(命名)된 객체들을 호명(呼名)하면서 전개된다. 그 객체들은 OO호텔, XX아파트처럼 문명화된 도시의 다양한 지표(index)로부터 시작되어 도시 환경의 이면에 존재하는 이름 모를 들풀들의 학명을 찾아 나서는 기표(signifiant)/기의(signifié)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작업들은 도시에 존재하고 있지만 해석되지 않는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도이자 실험이라 할 것이다.   

생각해 보자. 야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은 아담(Adam)이 각종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준 창세기의 신화 이래 ‘명명’이란 언제나 인간 주체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분명 주체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언제나 타자를 전제하였고 또 다른 타자로부터 비롯된 지표이기도 했다. 철수, 영희와 같은 이름도 그러하지만, 누구의 아내, 엄마, 동생, 선생, 제자, 선배와 같은 명명이란 언제나 주체와 타자의 관계 지형 속에서 작동한다. 즉 인간의 ‘이름 짓기’(명명)는 언제나 ‘이름 부르기’(호명)를 위해 존재했고, 명명의 의미론은 언제나 ‘사회적 인간’의 존재 의식을 전제하는 담론이었다. 

김라연은 도시 환경 속 사물과 식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것들에 대한 명명과 호명의 변주를 시도하면서, 회화적 표현의 관계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작업에서 안락함을 표방하는 ‘그레이스호텔(Grace Hotel)’ 또는 ‘파라다이스호텔(Paradise Hotel)’의 간판 네온은 작가의 개입에 의해서 ‘패러독스호텔(Paradox Hotel)’로 치환되고, 한 아파트 브랜드인 위브(We've)는 ‘위브낫씽(We've nothing)’이라는 이름으로 의미가 변주된다. 이 작품을 그녀는 〈도시 전치(City displacement)〉로 명명한다. 

이러한 이름 전치는 또 다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도시 재개발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황폐하게 방치된 건설 현장은 바람에 날아온 씨앗들로 인해 어느새 식물들로 뒤덮이기 마련이다. 공사장 펜스를 사이에 둔 채 ‘방치됨으로써 생성된 자연’과 ‘가꿈으로써 관리된 인공’이 병존하고 있는 풍경을 작가는 〈도시의 섬(Island of city)〉이라 명명한다. 

한편 자신의 회화와 함께 지뢰밭에서 가져온 흙을 설치해 DMZ프로젝트로 선보인 작품, 〈설<선∕섬⋰ (Language<Line∕Land⋰)〉을 통해서, 작가 김라연은 DMZ의 공간을 이야기(설)의 공간이기보다 분단의 철책(선)이나 북과 남 사이의 외딴 장소(섬)라는 존재적 실체로 인식하면서도 ‘설, 선, 섬’이 가지는 음차(音借)적 유사성을 통해서 언어적 의미를 지속적으로 유희한다. 나아가 이와 같은 자신의 설치 작품을 통해서 그녀는 비무장지대라는 ‘DMZ(demilitarized zone)’의 본래적 의미를 해체하고 ‘DMZ(Dissembled Zone)’이라는 새로운 명명을 통해서 비무장지대의 정치, 사회학적 담론을 언어적 유희를 통해서 새롭게 해석한다.  

그렇다. 명명된 모든 것들은 호명됨으로써 우리에게 존재로 살아난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구절, 즉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詩句)는 ‘존재적 의미의 변환’을 우리에게 절절하게 선사한다. 김라연의 작업 전반에서 감지되는 이러한 존재적 의미의 변환은 대개 ‘사라진 것들’, 혹은 ‘망각된 것들’에 대한 호명으로 기인한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인 〈낙원동 프로젝트(Nakwon-dong  Project)〉는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하고 있는 낙원빌딩과 그 주변의 역사를 추적하고 아카이빙하면서 ‘사라진 것들’ 혹은 ‘망각된 것’을 호명하여 ‘지금, 여기’에 소환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오래된 간판인 ‘낙원 삘딍’은 1970년대 당시의 외래어 표기를 상기하게 만들면서 우리에게 종로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망각된 집단적 기억’과 역사를 소환한다. 그녀의 이러한 창작 태도는 도시의 환경으로부터 자연의 의미를 찾고 있는 〈도시의 섬(Island of city)〉 연작이나 실내의 공간으로 귀착된 회화를 야외 환경으로 가지고 나가 설치하면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실험하는 〈찰나적 순간(At the Moment)〉 연작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II. 허구의 아포리즘으로 그리는 ‘살아 있는’ 식물 초상 

‘사라진 것들’ 혹은 ‘망각된 것들’을 호명하여 ‘지금, 여기’에 소환하는 것은 이름의 ‘원래적 의미’를 되묻고 명명된 것들을 ‘존재’로 등극시키는 일이다. 역사가의 사명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일은 작가 김라연에게서 허구의 아포리즘(aphorism)으로 접근된다. ‘삶의 통찰을 간결하게 함축해서 표현한 격언, 금언, 경구’를 아포리즘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분명코 진위를 판별하기 어려운 허구의 것이지만, 언제나 우리의 심중에 진리처럼 각인된다. 히포크라테스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선언이나 파스칼(Pascal)의 “인간은 갈대”라는 언술 역시 허구의 아포리즘이지만, 진중하게 곱씹어야 할 만큼의 삶의 통찰을 우리에게 전한다. 언술자의 ‘체험적인 진술에 바탕하고 있는 독창적 사유’가 우리의 심중을 울리는 까닭이다. 

그런 면에서 김라연이 도시의 간판을 허구의 이름으로 둔갑시키는 작품, 〈도시 전치(City displacement)〉나 이름 모를 들풀을 자신이 지어준 이름으로 일일이 명명하는 영상 작품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묻다(Call the name of the lost one)〉는 위에서 언급한 아포리즘의 미학을 중층적으로 함유한다. 도시의 공사 현장에서 공기(工期)가 지연된 시간 동안 집단적으로 서식하게 된 이름 모를 식물들을 하나하나 채집하면서 그것들에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은 시인의 시작(詩作)과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그녀는 활짝 핀 ‘애기똥풀(Asian greater celandine)’에 “만개한 얼굴”이라는 이름을 짓고, 수분을 가득 먹어 탱탱한 줄기를 선보이는 ‘망초(canadian horseweed)’를 보면서 “쭈뼛 선 머리칼 일흔 네 가닥”이라고 명명한다. 갈비뼈 모양으로 펼쳐진 나뭇잎들마다 잎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버드나무(willow)’를 보면서 그녀는 “늑골이 드러났을 때”라는 이름을 짓는다. 

이처럼 작가 김라연은 ‘이름 모를 들풀’을 채집하고 생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그것들의 이름을 파악했으면서도 실명을 부르기보다 차라리 시어(詩語)와 같은 이름을 새로 지어줌으로써 ‘사라진 것들’ 혹은 ‘망각된 것들’을 ‘살아 있는 것들’로 자리매김하고자 시도한다.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을 도시로 다시 불러내고 목소리를 갖게 한다.

 존재했지만 해석되지 못하고 사라진 이들의 의미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목소리를 갖게 된 이들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돌아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날도 머지않아 오게 되지 않을까.”

작가 노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객체를 명명/호명함으로써 그것을 ‘타자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누군가에게 명명/호명되면서 ‘타자적 존재로 인식되는’ 일은 이름이 갖는 의미론적/존재론적 위상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 짓기’와 더불어 일일이 ‘식물들의 초상’을 그려 함께 병치하면서 식물들에 담겨진 꽃말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찾아 가는 부수적인 일조차 그녀에겐 작업의 한 축이 된다. 그녀로서는,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사실적 존재와 허구적 상상’의 결합을 통해 ‘사라진 것들/망각된 것들’을 종합적으로 되살려 내려는 다각의 노력이 주요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내면 똥 같은 색을 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애기똥풀, 강 나루터에서 가지를 꺾어 정표로 주었다는 버드나무 등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이름 모를 존재’로부터 ‘찾은 이름(기표)’에 ‘새로운 의미(기의)’를 더하면서 그것의 실재적 면모를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름 모를 들풀에 상상 가득한 ‘이름 짓기’와 ‘이름 부르기’를 통해서 ‘허구의 아포리즘 미학’을 펼치는 김라연의 작업은 그런 면에서 ‘사라진 것들’을 소환하는 ‘식물 초상 그리기’라 정의해 볼만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식물 초상’은 실제적 이름과 과학적 분석에 근거한 학명(學名)을 통해서 실제로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녀의 최근작 〈구르는 식물들(Rolling the Flora)〉은 자신이 발견한 ‘이름 모를 들풀’의 실제 이름과 학명을 생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찾아내고 ‘아이소 핑크’로 만든 구(球) 위에 학명을 붙인 후 물감을 칠해 굴리는 퍼포먼스를 통해서 실재의 ‘감추어짐/드러남’ 또는 ‘사라진 것/살아 있는 것’의 존재론적 의미를 실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라연의 작업은, ‘이름 짓기(명명)’와 ‘이름 부르기(호명)’를 통해서 ‘사라진 것들’을 ‘지금, 여기’에 소환함과 동시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라는 실재를 대면하는 ‘식물 초상’, ‘개념적 풍경화’ 혹은 ‘예술 놀이’라 결론지을 수 있겠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작업이 ‘사회적 인간’에 대한 은유를 전제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