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김경현(다시서점)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다. 곳곳에 펜스가 쳐있고 흙먼지가 날린다. 우리는 높은 담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채 공사 중이라는 팻말 앞에서 97년을 보냈다. 작가는 ‘펜스의 형태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없는 틀(frame)을 형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임을 넘나드는 도시 속 문지기’들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둥지를 틀고 도시에 생기를 주는 존재’가 적어도 내게는 김라연 작가로 인식된다. 

 

인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사실이 프레임과 어울리지 않을 때, 프레임은 남고 사실은 무시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앞에 남은 프레임과 무시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펜스 속을 알기 위해서는 꾸준히 바라보아야 하고 프레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벽 앞에서 틀을 넘나드는 문지기(작가)들을 만나야 한다. 프레임이 프레임으로 그칠 때 생기는 단절과 곡해 앞에서 작가들은 꾸준히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아쉬움으로, 두려움으로 그치던 일들의 속내를 알리는 ‘작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낙엽을 들추고 나무를 들춘다. 또 건물을 들추고 도시를 들춘다. 우리가 쉽게 지나쳐온 이미지를 단순히 이미지에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을 들추고 바라보는 작업을 통해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한다. 작가가 우리가 간과해온 사실을 이야기할 때 프레임과 모순되는 이질적인 풍경으로 쉽게 지은 단정이 아니라 한 걸음 다가설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바라는 것,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저장한다. 세상은 그 이미지를 저장하기만 하는 창고가 되어버렸고, 이 세상을 설명하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바라는 피안(彼岸)은 현실 세계가 아닌 ‘낙원’ 등의 단어 속에만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끊임없는 노력에도 우리 주변에는 쉽게, 펜스가 쳐진다. 그런 점에서 작가가 그린 펜스 속 모습들은 이 시대를 함께 겪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단어는 그 사물을 쉽게 단언하지 못하다. 겪어온 환경이 만든 사고가 단어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만이 만들어진 사고를 여는 하나의 열쇠라고 볼 때, 관객들이 김라연 작가의 작업처럼 세상이라는 이미지에 개입하고 점유하면서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를 떠올리길 기대한다. 또한, 관객들의 시선이 펜스 속에 빠져들기를 바란다. 저 언덕을 함께 오르면 높게 쳐진 펜스의 밖, 현실이 보이지 않을까.

 

조지   레이코프  <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 >* 2010.